울 광화문 충무공 동상 photo 뉴시스
서울 광화문 충무공 동상 photo 뉴시스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1545~ 1598) 장군과 현재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교감하게 만드는 중요한 연결고리다. 충무공의 솔직한 고뇌를 느낄 수 있는 난중일기는 충무공 연구의 근본으로 평가받아 왔다. 다만 최근에는 충무공과 교류했던 이들과의 기록을 난중일기와 교차 검증하는 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난중일기만으로는 알기 부족했던 역사적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다.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기념해 문화재청 고궁박물관에서 일반인에 공개하는 서애 류성룡의 1600년(경자년) ‘대통력-경자’는 요즘으로 말하면 ‘다이어리’와 비슷하다. 월·일·절기 등을 표기한 여백에 그날의 날씨·일정·약속·병세와 처방 등을 직접 적어넣은 기록이 남아있다. 충무공과 류성룡은 개인 소유 종을 같이 부릴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이순신의 군관인 송두남이 1594년 3월 13일 이순신의 분부를 받아 3월 26일 서울에서 영의정 류성룡을 만나고 4월 16일 이순신에게 류성룡의 기별을 전했다는 기록도 있다. 

류성룡의 ‘대통력’은 본래 안동 하회 풍산류씨 충효당에 8책(1594년 갑오, 1596년 병신, 1597년 정유, 1598년 무술, 1604년 갑진, 1605년 을사, 1606년 병오, 1607년 정미)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작년 일본 소장자로부터 경자년 기록까지 사들였다. 무엇보다 경자년 기록은 그동안 드라마 등의 소재로 활용된 ‘충무공 자살설’이 허구임을 분명히 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의뢰를 받아 초서로 쓰인 문서 내용을 해독한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에 따르면 서애는 충무공이 숨지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전투(노량해전)하는 날에 직접 시석(화살과 돌)을 무릅쓰자, 부장들이 간언하여 만류하며 말하기를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으나 듣지 않고 직접 출전해 전쟁을 독려하다 이윽고 날아온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아아!(戰日, 親當矢石, 褊裨諫止曰, 大將不宜自輕 …(不)聽, 親出督戰, 旣而爲飛丸所中而死, 嗚呼)”

이와 유사한 내용이 서애의 ‘징비록’에 있었으나 ‘부장들이 가벼이 하시면 안 된다’고 말한 부분과 ‘직접 출전해 전쟁을 독려’했다는 내용이 경자년 기록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요즈음 다이어리와 비슷한 류성룡 대통력-경자 photo 문화재청
요즈음 다이어리와 비슷한 류성룡 대통력-경자 photo 문화재청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행록’ ‘징비록’ 등 여러 자료를 통한 연구를 종합해 1598년 노량해전 당시의 충무공 순국 순간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11월 19일 자정경에 이순신이 배 위에서 하늘에 빌기를, ‘이 원수를 제거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자, 홀연히 바다 가운데로 큰 별이 떨어졌다. 조명군이 몰래 출발했는데, 동쪽에 있는 왜군들은 이미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고 관음포에서 조명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진린이 계금(季金)과 함께 나아가고 여러 장수들이 뒤를 따랐는데 이순신이 앞장서서 전양으로 나갔다. 그 후 새벽 2시경 노량에서 일본선 500여척을 만나 아침까지 큰 격전을 벌였는데, 조명군이 좌우에서 장작불(柴火)을 마구 던지니 일본선이 연소되었다. 적이 불리해지자 관음포 항구로 후퇴하여 들어가니 날이 이미 새었고, 왜군은 뒤로 돌아갈 길이 없어 반격했는데 조명군들이 승세를 타서 육박전을 벌였다. 이때 이순신은 직접 북채를 잡고 먼저 올라가 일본군을 추격하며 죽이다가 적의 포병들이 배꼬리에 엎드린 채 일제히 쏜 탄환을 맞았다. 이순신은 눈을 감으며 ‘전투가 한창 급하니 부디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고 말하고는 운명하였다.”

노 위원장에 따르면 ‘대통력-경자’는 1년 12개월 중 203일치의 기록이다. 류성룡의 이름과 호가 적혀 있지 않았으나 내용의 체재와 형식 및 여백에 필사된 글씨 서체가 현존하는 8종의 대통력과 일치하여 류성룡의 기록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이번 ‘대통력-경자’뿐 아니라 다른 8책의 대통력을 집중 분석하면 새로운 사실도 추가로 발견된다는 것이 노 위원장의 설명이다. 

예컨대 난중일기 갑오년(1594) 7월 12일 자를 보면 류성룡이 죽었다는 소문이 적혀 있는데, 대통력-갑오 7월 24일 자를 보면 “병을 얻어 감기약을 복용해 열이 내렸다”고 적혀 있다. 류성룡의 건강악화가 사망설로 와전된 것을 알 수 있다. 또 대통력-정유(1597)를 보면 이순신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하 요시라의 간계로 인해 모함에 빠졌을 때 류성룡이 당시 상황을 적어 놓은 것들이 있다. 왕명 거역죄로 2월 6일 이순신에 대한 체포명령이 내려지고 3월 4일 파직 하옥되었는데 류성룡은 “통제사 이순신이 체포되고 원균에게 대신 통제사를 임명했다”고 적었다.

 

“간교한 자들의 말이라 믿을 수 없다”

당시 기록을 보면 지금의 국제 관계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탁영의 ‘정만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전에는 조선과 일본이 우방의 나라였지만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전국이 폐허가 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게 되면서 조선은 명나라의 도움에 의존하게 되었다. 사대 관계의 속국으로서 조선은 명나라의 명령을 받아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에는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부분들도 많다. 특히 충무공의 일본에 대한 평가가 그런데, 일본이 강화를 이야기하자 충무공은 이렇게 적었다. “원수(권율)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심유격이 이미 화해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은 헤아릴 수 없다. 전에도 놈들의 꾀에 빠졌었는데 또 이처럼 빠져드니 한탄스럽다.(갑오년 2월 5일)”

부하가 충무공에게 왜군의 성향을 보고한 내용도 있는데, 강화협상 결렬을 예상하는 듯하다. “동래 현령(정광좌)이 급히 보고하기를, ‘왜인들이 자주 마음이 바뀌는 모습(反側)이 보이고, 유격(游擊) 심유경(沈惟敬)이 (강화협상을 하러)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1월 16일에 먼저 일본으로 갔다’고 했다.(병신년 1월 18일)”

‘난중일기’에는 왜군에 대한 충무공의 적나라한 불신도 적혀 있다. “경상우수사(원균)의 군관이 와서 고하기를, ‘왜적 3명이 중선(中船)을 타고 추도(楸島)에 온 것을 만나 붙잡아 왔다’고 하기에 이를 심문한 뒤에 압송해 오도록 일러 보냈다. 저녁에 공태원(孔太元)에게 물으니, 왜적들이 바람을 따라 배를 몰고 본토(일본)로 향하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배를 조종할 수가 없어 떠다니다가 이 섬에 표박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간교한 자들의 말(詐黠之言, 不可信矣)이라 믿을 수가 없었다.(갑오년 5월 4일)”

※이 기사에 대한 자문과 감수는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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